「傘も」やっぱり独島だった


‘于山島’はやはり独島だった、海洋水産開発院ユミリム博士、朝鮮後期朴世堂が書いた資料発掘 (朝鮮日報(韓国語)2007/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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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溪朴世堂の「鬱陵島」原本。

独島(竹島)領有権で大きな争点だった「于山島が独島」という事実を立証できる新しい資料が発掘された。

韓国海洋水産開発院独島研究センター責任研究員である柳美林(ユ・ミリム)博士は最近、同開発院が発刊する「海洋水産動向」1250号で「朝鮮後期、朴世堂(パク・セダン、1629〜1703)が使った「鬱陵島」を分析した結果、于山島は鬱陵島ではなく独島を指す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と述べた。「独島は元々我が地」だったとする時、その重要な根拠は于山島の存在だった。

「世宗実録」地理志には「于山と武陵(于陵)の二島は(蔚珍)県の真東の海上にあるが、二島間の距離は遠くなく、晴れた日には両方からお互いの島を見ることができる。」と記録している。ここで「武陵」が鬱陵島、「于山」は独島というのが韓国学者たちの解釈だった。しかし、日本学者たちは「新増東国輿地勝覧(しんぞうとうごくよちしょうらん)」の注釈に「于山島と鬱陵島は本来一島だったという説もある」と言う内容を根拠に于山島は独島ではなく?鬱陵島か?鬱陵島から東方へ2キロメートル余り離れた竹嶋を言う、と主張して来た。

ところが、ユ博士らが朝鮮後期の主要学者の一人である西渓朴世堂の記録「鬱陵島」を分析した結果は違った。この文は朴世堂の11代子孫が2001年、韓国学中央研究員に寄託した「西溪宗宅古文書」の「西溪雑録」に載せられている筆写本で、今まで史料の存在が一般に知られていなかった。朴世堂はこの文で船に乗って鬱陵島へ行って帰って来た僧侶から伝え聞いた話を記録しながら次のように言及した。

「総じて二つの島(鬱陵島と于山島)はあまり遠くなくて、一度大きな風が吹けば着くことができる程度だ。于山島は地勢が低くて、天候が非常に晴朗でないとか最高の頂上に上がらなければ(鬱陵島は)見えない(不因海気極清朗、不登最高頂、則不可見)。

この記録は?‘于山島’は確かに鬱陵島のような島ではないという事実と、?竹島や観音島のように鬱陵島と接した島でもない、という事実を立証している。竹刀・観音島は鬱陵島で高く上がらないとか天気が曇っても肉眼で見られる島だからだ。それなら‘于山島’になることができる島は独島しかにない。

これは朴世堂と同時代人である三陟営将、張漢相(チャン・ハンザン、1656〜1724)が書いた‘鬱陵島史跡’で「(聖人峯(ソンインボン)から)東に海を眺めたら東南の方に島一つがかすかにあり、大きさは鬱陵島の3分の1にもならなくて距離は300余里に過ぎない」と言う記録とも通じる、とユ博士は説明した。

朴世堂と張漢相は二人とも日本側から独島が朝鮮の地という確認を受けた肅宗の時の漁夫、安竜福と同時代人という点で、彼らの認識はより重要な意味を持つというのだ。これに対してシン・ヨンハ梨花女大碩座教授は「初めて発掘されたもので、独島が私たちの地だったことを明らかにする非常に立派な資料」と述べた。


蚯蚓φ ★さんが翻訳





‘傘も’はやっぱり独島だった 
海洋水産開発院ユミリム博士,朝鮮後期朴世堂が書いた資料発掘
“鬱陵島で正常上がらないd傘島が見えなくて”…
‘傘島が鬱陵島’という 日 主張覆して
ユ・ソクぜ記者 karma@chosun.com 記者の他の記事表示


独島領有権で大きな争点だった ‘傘も(于山島)が独島’という事実を立証することができる新しい資料が発掘された.韓国海洋水産開発院独島研究センター責任研究員であるユミリム(柳美林) 博士は最近この開発院が発刊する ‘海洋水産動向’ 1250号で “朝鮮後期朴世堂(朴世堂·1629~1703)が使った ‘鬱陵島’を分析した結果,傘島は鬱陵島ではない独島を指称することで明かされた”と言った.



‘ 独島が元々我が地’だったとする時その重要な根拠は傘も(于山島)の存在だった.‘世宗実録’ 洩らすのは “傘(于山)と武陵(武陵) 二つの島が蔚珍県の東海の中ある.二つの島はお互いに距離が遠くなくて天気が晴れれば見られる”と記録している.ここで ‘武陵’が鬱陵島,‘傘’は独島というのが韓国学者たちの解釈だった.

しかし日本学者たちは ‘信証東国輿地勝覧’の柱石に “傘島と鬱陵島が本来一島だったという説もある”と言う内容を根拠で傘島は独島ではなく ①鬱陵島とか ②鬱陵島で洞方へ 2㎞ 余り離れた竹刀(竹島)を言うことだと主張して来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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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独島背景の日の出./東海海警提供

しかしユ博士などが朝鮮後期主要学者中の一人である西界(西渓) 朴世堂の記録 ‘鬱陵島’を分析した結果は違った.この文は朴世堂の 11台子孫が 2001年韓国学中央研究員に寄託した ‘西界ゾングテック古文書’ 中 ‘西界雑録’に載せられている筆写本で,今まで史料の存在が一般に知られなかった.朴世堂はこの文で船に乗って鬱陵島へ行ってから帰って来た僧侶から伝えて聞いた話を記録しながらこんなに言及した.

“たいてい二つの島(鬱陵島と傘も)があまり遠くなくて一度大きい風が吹けば触れることができる位だ.傘島は地税が低くて,天気が非常に清くないとか最高頂上に上がらなければ (鬱陵島で) 見えない(不因海気極清朗,不登最高頂,則不可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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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界朴世堂の‘鬱陵島’原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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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記録は ①‘傘も’は確かに鬱陵島のような島ではないという事実と,②竹刀や観音島のように鬱陵島と接した島でもないという事実を立証している.竹刀·観音島は鬱陵島で高く上がらないとか天気が曇っても肉眼で見られる島だからだ.そうだったら ‘傘も’になることができる島は独島しかにない.

これは朴世堂と同時代人物である三尺令状壮漢上(張漢相·1656~1724)が書いた ‘鬱陵島史蹟’で “(聖人峯で) 東に海を眺めたら東南の方に島一つがかすかにあるのに,大きさは鬱陵島の 3分の 1にならなくて距離(通り)は 300余りえ経たない”と言う記録とも通じることだとユ博士は説明した.朴世堂と壮漢上は皆日本側から独島が朝鮮地という確認を受けた肅宗の時の漁夫安竜福(安竜福)と同時代人物という点でこれらの認識はもっと重要な意味を持つというのだ.これに対してシン・ヨンハ梨花女大碩座教授は “初めて発掘されたことで,独島が私たちの地だったのを明らかにする非常に立派な資料”と言った.


入力 : 2007.12.04 00:16 / 修正 : 2007.12.04 03:06






‘우산도’는 역시 독도였다 
해양수산개발원 유미림 박사, 조선후기 박세당이 쓴 자료 발굴
“울릉도에서 정상 안오르면 우산도가 보이지 않아”…
‘우산도가 울릉도’라는 日 주장 뒤집어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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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영유권에서 커다란 쟁점이었던 ‘우산도(于山島)가 독도’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가 발굴됐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독도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인 유미림(柳美林) 박사는 최근 이 개발원이 발간하는 ‘해양수산동향’ 1250호에서 “조선 후기 박세당(朴世堂·1629~1703)이 쓴 ‘울릉도’를 분석한 결과, 우산도는 울릉도가 아닌 독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독도가 원래 우리 땅’이었다고 할 때 그 중요한 근거는 우산도(于山島)의 존재였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이 울진현의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무릉’이 울릉도, ‘우산’은 독도라는 것이 한국 학자들의 해석이었다.

하지만 일본 학자들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주석에 “우산도와 울릉도가 본래 한 섬이었다는 설도 있다”는 내용을 근거로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①울릉도이거나 ②울릉도에서 동쪽으로 2㎞ 남짓 떨어진 죽도(竹島)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 독도 배경의 일출. /동해해경 제공 
하지만 유 박사 등이 조선 후기 주요 학자 중의 한 사람인 서계(西溪) 박세당의 기록 ‘울릉도’를 분석한 결과는 달랐다. 이 글은 박세당의 11대 후손이 2001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한 ‘서계 종택 고문서’ 중 ‘서계잡록’에 실려 있는 필사본으로, 지금까지 사료의 존재가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박세당은 이 글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에 갔다가 돌아온 승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를 기록하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대개 두 섬(울릉도와 우산도)이 그다지 멀지 않아 한번 큰 바람이 불면 닿을 수 있는 정도다. 우산도는 지세가 낮아, 날씨가 매우 맑지 않거나 최고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울릉도에서) 보이지 않는다(不因海氣極淸朗, 不登最高頂, 則不可見).”

▲ 서계 박세당의‘울릉도’원본.
이 기록은 ①‘우산도’는 분명 울릉도와 같은 섬이 아니라는 사실과, ②죽도나 관음도처럼 울릉도와 인접한 섬도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죽도·관음도는 울릉도에서 높이 올라가지 않거나 날씨가 흐려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산도’가 될 수 있는 섬은 독도밖에는 없다.

이는 박세당과 동시대 인물인 삼척영장 장한상(張漢相·1656~1724)이 쓴 ‘울릉도 사적’에서 “(성인봉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동남쪽에 섬 하나가 희미하게 있는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이 안 되고 거리는 300여 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록과도 통하는 것이라고 유 박사는 설명했다. 박세당과 장한상은 모두 일본측으로부터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확인을 받은 숙종 때의 어부 안용복(安龍福)과 동시대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인식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처음 발굴된 것으로, 독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밝히는 매우 훌륭한 자료”라고 말했다.


입력 : 2007.12.04 00:16 / 수정 : 2007.12.04 03:06

  • 最終更新:2009-05-22 17:4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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