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渓雑録 ゆびりん
ウサン島’はやはり独島(ドクト)であった
ユ・ソクチ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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入力:2007.12.04 00:16 ¦修正:2007.12.04 03:06
海洋水産開発院ユ味りん博士、朝鮮後期パク・セダンが使った資料発掘
“鬱陵島(ウルルンド)で正常上がらなければウサン島が見られなくて”…
‘ウサン島が鬱陵島(ウルルンド)’という日主張ひっくり返して
独島(ドクト)領有権で大きな争点だった‘于山島が独島(ドクト)’という事実を立証できる新しい資料が発掘された。 韓国海洋水産開発院独島(ドクト)研究センター責任研究員である柳米林博士は最近が開発院が発刊する‘海洋水産動向’ 1250号で“朝鮮末期パク・セダン(朴世堂・1629~1703)が使った‘鬱陵島(ウルルンド)’を分析した結果、ウサン島は鬱陵島(ウルルンド)でない独島(ドクト)を指し示すと明らかになった”と話した。
‘独島(ドクト)が本来私たちの土地’だったとする時その重要な根拠は于山島の存在であった。 ‘世宗(セジョン)実録’地理誌は“于山と武陵二島が蔚珍(ウルチン)県の東側海の中である。 二島は互いに距離が遠くなくて天気がよければ見ることができる”と記録している。 ここで‘武陵(ムルン)’が鬱陵島(ウルルンド)、‘傘’は独島(ドクト)というものが韓国学者の解釈だった。
だが、日本学者は‘信証東国輿地勝覧’の注釈に“ウサン島と鬱陵島(ウルルンド)が本来一石であったという説もある”という内容を根拠にウサン島は独島(ドクト)でなく①鬱陵島(ウルルンド)や②鬱陵島(ウルルンド)から東に2km余り落ちた竹島をいうことだと主張してき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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独島(ドクト)背景の日の出. /東海海上警察提供
だが、ユ博士などが朝鮮末期主な学者のうちのひとりである西渓パク・セダンの記録‘鬱陵島(ウルルンド)’を分析した結果は違った。 この文はパク・セダンの11台子孫が2001年韓国学中央研究員に寄託した‘西界(ソゲ)ジョンテク顧問で’中‘西界(ソゲ)雑録’に載っている筆写本で、今まで飼料の存在が一般に知らされていなかった。 パク・セダンはこの文で船に乗って鬱陵島(ウルルンド)に行って帰ってきた僧侶から伝え聞いた話を記録してこのように言及した。
“たいてい二島(鬱陵島(ウルルンド)とウサン島)がそれほど遠くなくて一度大きい風が吹けばつくことができる程度だ。 ウサン島は地勢が低くて、天気が非常にきれいでなかったり最高頂上に上がらなければ(鬱陵島(ウルルンド)で)見られない(不因海気極清朗、不登最高頂、則不可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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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界(ソゲ)パク・セダンの‘鬱陵島(ウルルンド)’原本.
この記録は①‘ウサン島’は明らかに鬱陵島(ウルルンド)のような島でないという事実と、②竹島(チュクト)やクァン音度のように鬱陵島(ウルルンド)と隣接した島もないとの事実を立証している。 竹島(チュクト)・クァン音度は鬱陵島(ウルルンド)で高く上がらなかったり天気が曇っても肉眼で見ることができる島であるためだ。 それなら‘ウサン島’になることができる島は独島(ドクト)の外にはない。
これはパク・セダンと同時代人物である三陟(サムチョク)令状壮漢上(張漢相・1656~1724)が使った‘鬱陵島(ウルルンド)史跡(私的)’で“(聖人峯(ソンインボン)で)東に海を眺めると東南の側に島一つがかすかにあるが、大きさは鬱陵島(ウルルンド)の3分の1にならなくて距離(通り)は300余里に過ぎない”という記録とも通じることだとユ博士は説明した。 パク・セダンと壮漢上は全部日本側から独島(ドクト)が朝鮮土地という確認を受けた粛宗時の漁師安龍福と同時代人物という点でこれらの認識はさらに重要な意味を持つということだ。 これに対して信用下梨花(イファ)女子大客員教授は“初めて発掘されたことで、独島(ドクト)が私たちの土地であったのを明らかにする非常に立派な資料”と話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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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処]みた記事は朝鮮ドットコムで作成された記事です
우산도’는 역시 독도였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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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12.04 00:16 | 수정 : 2007.12.04 03:06
해양수산개발원 유미림 박사, 조선후기 박세당이 쓴 자료 발굴
“울릉도에서 정상 안오르면 우산도가 보이지 않아”…
‘우산도가 울릉도’라는 日 주장 뒤집어
독도 영유권에서 커다란 쟁점이었던 ‘우산도(于山島)가 독도’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가 발굴됐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독도연구센터 책임연구원인 유미림(柳美林) 박사는 최근 이 개발원이 발간하는 ‘해양수산동향’ 1250호에서 “조선 후기 박세당(朴世堂·1629~1703)이 쓴 ‘울릉도’를 분석한 결과, 우산도는 울릉도가 아닌 독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독도가 원래 우리 땅’이었다고 할 때 그 중요한 근거는 우산도(于山島)의 존재였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두 섬이 울진현의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맑으면 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무릉’이 울릉도, ‘우산’은 독도라는 것이 한국 학자들의 해석이었다.
하지만 일본 학자들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주석에 “우산도와 울릉도가 본래 한 섬이었다는 설도 있다”는 내용을 근거로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 ①울릉도이거나 ②울릉도에서 동쪽으로 2㎞ 남짓 떨어진 죽도(竹島)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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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배경의 일출. /동해해경 제공
하지만 유 박사 등이 조선 후기 주요 학자 중의 한 사람인 서계(西溪) 박세당의 기록 ‘울릉도’를 분석한 결과는 달랐다. 이 글은 박세당의 11대 후손이 2001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한 ‘서계 종택 고문서’ 중 ‘서계잡록’에 실려 있는 필사본으로, 지금까지 사료의 존재가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박세당은 이 글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에 갔다가 돌아온 승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를 기록하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대개 두 섬(울릉도와 우산도)이 그다지 멀지 않아 한번 큰 바람이 불면 닿을 수 있는 정도다. 우산도는 지세가 낮아, 날씨가 매우 맑지 않거나 최고 정상에 오르지 않으면 (울릉도에서) 보이지 않는다(不因海氣極淸朗, 不登最高頂, 則不可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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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박세당의‘울릉도’원본.
이 기록은 ①‘우산도’는 분명 울릉도와 같은 섬이 아니라는 사실과, ②죽도나 관음도처럼 울릉도와 인접한 섬도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죽도·관음도는 울릉도에서 높이 올라가지 않거나 날씨가 흐려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산도’가 될 수 있는 섬은 독도밖에는 없다.
이는 박세당과 동시대 인물인 삼척영장 장한상(張漢相·1656~1724)이 쓴 ‘울릉도 사적’에서 “(성인봉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동남쪽에 섬 하나가 희미하게 있는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이 안 되고 거리는 300여 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록과도 통하는 것이라고 유 박사는 설명했다. 박세당과 장한상은 모두 일본측으로부터 독도가 조선 땅이라는 확인을 받은 숙종 때의 어부 안용복(安龍福)과 동시대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인식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처음 발굴된 것으로, 독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밝히는 매우 훌륭한 자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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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 最終更新:2015-11-08 01:38:39